길엘. 무제

톨킨버스 2014. 11. 12. 13:37

낌새가 이상했다. 유난히 온화한 린돈의 엘프들은 오늘따라 몸에 배인 친절함의 끝을 보였고 처리해야할 서류들이 산더미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유가 있다며 결재를 올리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숨쉬듯 넘겨도 제 시간에 처리하지 못할 결재서류들이 올라오지 않는 사태에 관하여 엘론드는 답지않게 미간을 찌푸리고 항의해 보았지만 말갛게 웃는 대신들의 얼굴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을 것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내고 있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눈치빠른 엘론드는 바로 이곳 저곳을 찌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써 보았지만 정작 이 일의 주도권을 가진 길 갈라드는 그저 휘파람을 불며 짧게 주어진 휴식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한참동안이나 서기관들을 닥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엘론드의 불퉁한 말투가 들려왔다.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휴식을 즐기던 길 갈라드는 오래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다며 배싯 웃음을 보였다. 지금 웃으실 때 입니까? 라며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길 갈라드는 그저 자장가인 것 마냥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아보였다. 주군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머쓱해진 엘론드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크지 않은 서재에서 익숙하리만치 마음 편해지는 종이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어색했다. 한참이고 바쁠 시기에도 바쁘지 않을 시기에도 엘론드는 주군과 함께 방 안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정리하고 바라보는 그 바쁜 틈틈이 미간을 찌푸려 집중한 대왕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엘론드의 비밀스러운 습관 중 하나였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처음이었기에 엘론드는 혹여나 크게 울리고 있는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혼인 서약을 올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침대는 여전히 두 개였고, 길 갈라드와 엘론드는 다른 두 개의 침대에서 각자 잠을 청했다. 그것이 같은 방이라는 것은 그동안 함께 해온 시간에 비하면 대단한 변화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특별한 설렘을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둘은 바빴고 바빴다. 침실까지 서류더미를 챙겨오는것이 다반사였고 잠에지쳐 꾸벅꾸벅 졸고있을때 슬그머니 이불을 덮어줄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지금의 엘론드와 길 갈라드를 설명할 수 있는 관계의 전부였다. 한때는 불같이 뜨겁고 달콤한 입맞춤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엘론드는 곧 씁쓸히 웃으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남들이 이야기 하기에 대왕과 자신은 소위 신혼생활 중이었지만 그런 평범한 것을 요구하기에는 자신의 성별은 남자였고 길 갈라드는 너무도 지위가 높았다. 정략결혼. 그래, 가신이 주군께 충성하기 위해 기사의 예를 갖추듯 자신 또한 비슷한 방식의 예를 갖추었다고 엘론드는 늘 스스로를 다독였다. 좀더 든든하고 안정된 린돈을 지켜나가기 위해 몸소 뛰며 실천하고 있는 길 갈라드의 앞날을 스스로 막아선 안됐다. 그것은 주군으로서, 혹은 남몰래 연모하는 이로서 모셔야 할 이에 대한 엘론드의 굳건한 다짐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숨 조차 쉬지 못한 채, 길 갈라드의 눈 감은 모습을 훔쳐보던 엘론드를 구한 것은 다름아닌 글로르핀델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쉬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대왕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던 글로르핀델은 주무시는 대왕을 뒤로 한 채 욕실로 엘론드의 등을 떠밀었다. 크고 화려한 욕조의 입구에는 사자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조각했고 섬세하게 장식된 벽들은 이른 새벽녘에 따온 향 좋은 장미로 꾸며져 있었다. 평소와는 현저히 다른 욕실의 모습에 당혹감을 보인 엘론드였지만 꿀을 바른듯 달콤하게 이끄는 글로르핀델의 말에 오늘은 그저 잠자코 있기로 했다.


더운 물을 욕조 가득 손수 채우며 꽃잎을 띄운 글로르핀델은 피로를 푸시라며 목욕을 권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간들 속에 이런 여유는 정말이지 오랫만이었다. 혼인 서약 후 공식적으로 대왕의 결재가 필요한 것들이 자신에게로 분배되기 시작하며 엘론드는 그 흔한 산책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혹 이렇게 서류가 올려지지 않는 것이 글로르핀델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 엘론드는 불편했던 마음을 편히 갖기로 했다. 뜨끈한 물이 온 몸을 적시고 마음까지 노곤하게 풀어질 무렵까지 참으로 오랫만에 엘론드는 한낮의 느긋함을 즐겼다.

 

 

급하게 두드려진 노크소리에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슬쩍 감싼 엘론드의 양 뺨이 열기에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가벼운 가운만 입고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손님에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에레스토르가 유들하게 웃으며 별다른 일이 없을듯 하니 바로 침실로 오라는 길 갈라드의 전언을 전했다.

 

"...방 구조가 변하였구나."
"...그렇네요."
"날 왜 보자 하였느냐?"
"...대왕께서 절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옷도 못 갈아입고 오는 길이었는데.."

불안한 눈빛이 서로를 마주했다. 어색한 기분이 양 옆을 휙휙 돌아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야 할 서류들이 모조리 사라졌고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 또한 사라졌다. 늘 바깥을 볼 수 있게 열어둔 창문은 꼭꼭 닫힌 채 커튼까지 내려져 있었고 가끔 차를 마시던 작은 탁자와 의자 또한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방 안에 있는것은 엘론드가 쓰던 작은 침대 하나 뿐 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황급히 문으로 다가가 열어제치려는데, 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번 덜컹여 밀어보았지만 꿈적도 하지 않는 문에 엘론드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글로르핀델? 에레스토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문을 두드리던 엘론드가 급하게 몸을 숙였다. 문 아래 좁은 틈으로 무언가 삐죽 나와 있었다. 얇은 종이였다.
어느새 다가온 길 갈라드가 엘론드의 손에서 그 종이를 건네받았다. 유려한 필기체로 써진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좋은 밤 보내시길.]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론드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질 못하고 파르라니 흔들렸다. 종이를 들고 있던 길 갈라드 조차 조금씩 우그러지는 종이를 바라보며 당혹감에 젖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아주 작은 침대가 있었다. 엘론드의 침대였다.

 

 

 

+ 4월에 썼던건데 왜 비공개로 되어있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끌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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