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게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온통 정신이 멍해졌다. 촛점을 잃은 눈은 들고있는 서류를 그저 검은 글씨와 흰 종이로 구분하고 있었다. 몇번 눈을 깜박여 보였지만 도무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눈가를 문지르며 엘론드는 들고 있던 서류를 놓고 그대로 책상위에 엎드렸다. 어지럽게 쌓인 책더미 사이로 열려있는 창문과 들이치는 비에 젖고있는 카펫이 저 멀리 보였다. 문을 닫아야 할 텐데. 하지만 도무지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들질 않았다. 며칠 내내 내리는 겨울비의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기라도 한 듯, 온몸의 감각이 둔해지고 무뎌졌다. 게으름을 부리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라고 되뇌이면서도 침실까지 누가 옮겨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있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쳐졌다. 어자피 급한 일들은 모두 마무리 지어놓은 상태였으니 하릴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멀리한 채 엘론드는 눈을 감았다. 눅눅해진 비에 젖은 머릿속을 조금 쉬게하고 침실로 돌아가야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어깨위로 풀썩 무언가가 덮였다. 조용히 다가오던 추위에 가늘게 떨리던 몸이 한순간에 포근해졌다. 엉겁결에 눈뜬 엘론드의 시선이 앞에서 어룽대던 금발에 고정됐다. 글로르핀델과는 다른 투명한 빛을 내뿜는 금빛.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는 스란두일이었다.

"자네가 이곳엔 어쩐 일인가?"
"내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오던가?"
"그도 그렇지만."

평소였다면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며 금세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졌겠지만 오늘은 그다지 기운이 나질 않았다. 엎드린 채, 눈만 껌뻑이자 못볼 꼴을 본다는 듯 찡그려진 미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디 아픈가?"

제멋대로 이마에 손을 얹고 이리저리 자신을 휘두르는 손짓에 엘론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만두게. 밀치고 일어서려는 순간 강한 힘이 그를 막았다.

"뭐 하는겐가?"
"피곤해 보이니 그냥 그대로 있게. 뭘 또 일어나. 대단한 손님 온 것도 아닌데."

버둥거리는 엘론드를 그대로 책상위로 눌러놓고는 근처의 의자를 당겨 가까이 앉았다. 턱을 괴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제서야 또렷하게 잡혔다.

"천하의 엘론드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도 보이고. 임라드리스도 이제 갈 데 까지 간 모양이군."
"매번 그렇게 내 속을 긁으면 재미있지?"
"어떻게 알았지?"

볼멘 소리로 대답했지만 혼자서 웃는 스란두일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길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얼굴을 바라보다 일어선 스란두일은 제멋대로 진열장으로 향했다. - 그 전에 불어오는 바람을 살피고 투덜거리며 열린 창문을 닫는것을 그는 잊지 않았다.- 잔을 들고 다가와 엘론드의 코앞에 내려놓고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뭔가?"
"오랫만의 귀한 술이지."
"오랫만이라는 단어와 술이라는 단어를 함께 듣자니 기분이 이상한걸."
"토달지 마. 어렵게 구한거니까."
"그래서 그거 자랑하러 이곳까지 뛰어온겐가?"
"당연한 일을 묻는군."

씨익 웃는 모습으로 마개를 따내고 두어번 빙그르르 병을 돌리는 스란두일의 손에선 달디단 내음이 났다. 멍하니 코앞의 와인잔이 차오르는것을 지켜보던 엘론드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맞추어 앞쪽으로 밀쳐진 잔에서 술이 요동치며 출렁였다.

"기포가 차올라."
"그렇군."
"처음 맡는 향인데?"
"귀한거니까."
"품종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으셨나? 잔말 말고 맛이나 보시지."
"......"
"싫으면 먹지 말던가."

늘 있어왔던 도발이었지만 소모전을 하기엔 엘론드는 너무 피곤했다. 군말없이 집어든 잔은 부딧혀 소리를 냈다. 코끝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향이 달큰하게 피어올랐고 곧 안을 후끈하게 덥혔다. 어디선가 느껴본 익숙한 향과 맛이었지만 그것을 떠올리기도 전에 엘론드는 이미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켜버렸다.

"목마른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급하게 마셔?"
"...글쎄. 귀한 술이라고 들어서 그런지 착착 붙는군."
"별 일이야. 정말로."
"왜. 아깝나?"
"그럴리가."

연거푸 두 잔을 청해 마시고 난 엘론드가 겨우 일으켰던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고 있던 스란두일이 홀로 웃어보였다. 정말로 오늘은 자네 답지 않아. 빙글빙글 잔을 돌리며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에 엘론드는 못마땅한 모습으로 쳐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피곤해졌어."
"그럼 자면 되지."
"벌써..?"
"벌써라고 하기에는 밤이 이리 깊었는데."
"흐음..."

가늘게 뜬 눈으로 스란두일을 훝어보던 엘론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 깊은 밤중에 연락도 없이 쳐들어온 손님은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술에 뭐 탄거 아니지? 진심으로 피곤해졌어."
"에루께 맹세코 나는 결백해. 아무리 내가 자넬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누가 들으면 내가 음식인 줄 알겠네."
"먼저 의심한 게 누군데."
"그래 내가 잘못했어. 미안."

순순히 사과하며 작게 하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만지작대던 잔을 내려놓았다. 방까지 데려다줄까? 자네 정말 피곤해 보여. 하지만 늘상 그렇듯 호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거워진 몸을 일으킨 엘론드는 술기운이 올라 발그레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오늘은 그냥 아무곳에나 들어가서 눈을 붙이게. 엘크는 제발 안뜰까지 데려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럼 안녕. 좋은 밤 되길.
제멋대로 던진 인사를 끝으로 불안정한 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소리죽여 뒤를 밟으며 스란두일은 미소지었다. 점점 휘청이던 걸음은 불안해졌고 방문에 당도하기도 전에 느릿해졌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먼저 열렸다.

"아버님."

중심을 잃어 앞으로 기울어진 몸을 안아든 엘프가 놀란 목소리로 엘론드를 불렀다. 엉거주춤 일어선 채,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엘프를 확인한 엘론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가 이시간에 어쩐 일이냐."
"너무 늦게까지 서재에 계시길래 걱정이 되서 와봤습니다만.. 손님이 계셨습니다."
"손님은 무슨.. 아무튼 고맙구나. 이제 들어가려던 참이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제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그래. 잠깐 중심을 잃은것이니 괜찮다."
"다행입니다."

꼭 껴안은 손이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가만히 아비의 애정을 받는 아들의 눈이 뒤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있는 스란두일을 도발하듯 웃어보였다. 하지만 스란두일은 그저 코웃음을 보인 채,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얄밉다는 표정으로 변한 엘라단이 이내 엘론드를 일으켰다.

"침실로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혼자 갈 수 있으니 너는 손님을 모셔야겠다."
"그래도.."
"엘라단."
"..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도 양해를 구하지요. 아버님 먼저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괜찮으니 상관하지 말아. 먼저 안으로 모시도록 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가늘게 뜬 스란두일을 쳐다보던 엘론드는 한숨을 쉬곤 엘라단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미소짓는 얼굴이 손을 내밀었고 엘론드는 망설임없이 그 손을 잡았다.

"먼저 들어가겠네."
"좋은 꿈 꾸길."

짧은 인사와 함께 움직인 두개의 몸은 천천히 복도를 나아갔다. 하지만 그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엘론드의 발걸음이 불안해졌고 부축하고 있던 엘라단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아비를 지탱하기에 바빴다.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던 몸짓은 곧 부질없어졌다. 툭, 하고 엘라단의 어깨위에 떨어진 엘론드의 얼굴은 편안히 잠든 모습 그 자체였다.

"말은 바로하셨어야지요. 에루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가 너무나도 가볍지 않습니까."
"틀린말을 했더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에 약을 탄 것은 너이지 내가 아니니까."
"...어쩐지 도와드리고도 손해를 보는 느낌입니다."
"기분탓이니 안심해도 좋아."
"아 그러십니까."

한숨을 쉬며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엘론드를 바라보던 엘라단은 금새 다가온 스란두일의 품으로 엘론드를 넘겨주었다. 장신의 엘프는 참으로 간단하게 자신의 아비를 들쳐 업고는 좋은 꿈 꾸라는 한 마디 인사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처구니 없이 바라보던 시선이 황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침실은 그 방향이 아닌데.."
"아, 나도 알아. 하지만 엘론드가 오늘은 그냥 아무곳에나 들어가라고 했으니 그의 말대로 아무곳에나 가보려고."
"...정말 싫은성격이네요."
"뭐 자네에게까지 좋을 성격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하 웃으면서 제 갈길을 가는 스란두일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엘라단은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부디 밤새 숙면하시길 빌게요. 절대 깨지 마시길.
그런 자식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다시한번 거세진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엘론드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길고 긴 복도에 짖궂은 금빛의 미소만을 남기고 숲의 왕은 은밀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스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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