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더미를 가득 품에 안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발걸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레스토르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오 에루시여. 지금 제 눈에 스친 것이 헛것이길 바랍니다. 제가 요즘 피곤하긴 했죠. 며칠 내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잖아요. 이러실 순 없어요. 남들이 보았으면 살짝 미친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고개를 흔들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에서야 에레스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혼자서 착각을 한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가짐을 가슴과 머리에 몇번이고 새기고서야 슬그머니 불길한 예감이 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이 절망했다. 
아무도 없는, 아니 지금 이시간이라면 당연하리만치 비어있어야 할 안쪽의 뜰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나뭇잎을 뜯어먹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엘크였다. 엘크!!! 엘크!!! 그래 엘크!!! 빌어먹을 어둠숲의 왕인지 뭔지 나부랭이가 타고다니던 그 엘크!!! 사슴같은거!! 뿔만 엄청 큰 그거 말이다!!! 갑자기 차오르는 분노에 손 안의 서류더미들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진정하자. 제발. 응. 에레스토르. 심호흡 하고. 아닐수도 있잖아. 응? 그렇게 한참동안 마인드컨트롤을 걸었지만 안타깝게도 효과는 보이질 않았다. 저 엘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빌어먹을 그 분께서 임라드리스에 발걸음을 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스스로를 속일수는 없었다. 한참이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던 엘프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채, 안쪽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무슨일이 있어도 한마디 해야 할 성 싶었다.

 

평소였다면 일의 경중과 순서를 따라 정리되었을 서류들은 당장 급한 것 몇 개만 추려진 채,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일주일 후에 있을 회의에 맞추자면 밤을 새도 아까울 시간들 이었지만 지금은 로드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매번 같은 시기였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며 손님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임라드리스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그 자는 매번 이렇게 뻔뻔하게 숨어들어왔다. 대체 경비병이 있는데 어떻게 눈에 띄지않은 채 이곳까지 향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조차 없었다. 물론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임라드리스에 입성을 했다면 조금은 대우 할 명분이라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매번 그래왔듯 앞으로의 일정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힘들었다. 분명 로드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을테지.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고 친우로 온 것이라 둘러대며 같은 방을 쓰고 매 시간을 붙어 있으며 로드의 신경을 쓰이게 만들테고. 거절하는 법이 없는 로드는 휴식을 취하셔야 할 시간조차 그 자에게 할애할 것이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화가 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 이었다. 좋은 때 다 놔두고 왜 매번 제일 바쁠 시기에 오는걸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데. 언젠가부터 벼르고 있던 울분이 터질듯 달아올랐다. 로드면 어떻고 엘븐 킹이면 어떨까. 나는 임라드리스의 가신이고 나의 주군을 섬기는 이인데. 가신의 충언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은 누구에게도 없을 터였다.
서가를 나서는 걸음이 침착하리만치 가라앉았다. 어자피 흥분해서 다다다 쏘아대기만 한다면 비웃음을 당하는 쪽은 이쪽일 게 뻔했다. 대체 어떻게 비꼬아야 예를 갖추는 듯 하면서도 기분이 제대로 나쁠까를 생각하며 안가로 향하고 있던 무렵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에레스토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무서운 얼굴로 어딜 가십니까? 에레스토르 경?"

서글서글한 눈매가 순하게 휘어지며 아는척을 해댔다. 가던 방향을 틀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등 뒤로 햇살이 반사되어 흩어졌다. 화려한 금색의 머리칼이 너울대는 모습만 보면 늘 에레스토르는 정신이 산란해짐을 느꼈다. 되도록이면 보고싶지 않은 얼굴인데.. 오늘은 필시 재수가 없는 날임에 틀림이 없었다.

"볼일이 있어서요. 그럼."
"그렇다고 인사도 나누지 않으시고 그리 매정하게 가십니까. 저 상처받습니다."

정말이지 상처받은 모습으로 비맞은 강아지마냥 축 쳐진 눈썹에 한숨이 나왔다. 매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은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명확했다. 자신을 막으러 온 것이다. 아마도 그 자의 명을 받았을테지. 안그래도 지끈지끈하던 머리가 더더욱 아파왔다. 지금은 이자에게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매정하게 한 적 없습니다. 글로르핀델 공. 저는 볼일이 있으니 이만 실례하지요."
"지금 그 태도조차 매정하신데요."

우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모습이 거짓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여간해선 길을 비켜주지 않을거라는 것을 깨달은 에레스토르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로드께 가야합니다. 비켜주십시오."
"로드께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잠시 해야할 일이 있으니 에레스토르 경을 보필하라구요."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그 명은 로드께서 내리신 것이 아닐겁니다."
"맞는데.."
"아 쫌!!!!! 비키라구요!!!"

미적대며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있는 글로르핀델을 보며 에레스토르는 결국 폭발했다.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사납게 노려보는 모습은 상급자에게 보일만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 짜증을 받아내는 글로르핀델 또한 이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그저 웃어보일 뿐 이었다.
 
"안 돼. 안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 빌어먹을 왕인지 뭔지 쫒아내고 말거에요."
"말조심해야지. 그래도 엘븐 킹이시다."
"알게 뭐람."
"이건 뭐 나 조차도 믿지 않을 녀석이군."
"사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재육화고 나발이고 살아 돌아왔다는 걸 대체 어떻게 믿느냔 말이야."
"난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처럼 죽었다 돌아온 것도 아니고 몇시대에 걸친 생을 견디며 왕의 자리에 오르신 분을 함부로 칭하는 것은 좀 그런데. 요즘 엘프들은 공사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 편인가? 아니면 그대가 버릇이 없는걸까."
"신경 끄시죠. 어르신. 요즘 유난히 나한테 간섭이 심한 거 알아요?"
"어르신은 아니지. 말은 바로해라 꼬마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재육화 하고부터 몸 나이는 아직 현역이란다."
"꼰대질 하는 그 성격은 어르신 맞는 것 같은데."

혀를 차며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보며 글로르핀델은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다리를 비딱하게 짚은 채, 자신을 노려보던 에레스토르는 한참을 그리도 쳐다보다가 비켜주지 않을 요량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가로 통하는 길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덕에 겨우 안도한 얼굴에는 평소처럼 미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주 잠깐 글로르핀델을 방심시킨 에레스토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길이 나지 않은 숲 근처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은색의 머리칼을 보며 글로르핀델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서렸다. 설마 길도 아닌 곳으로 향할 줄은...
머릿속으로 로드의 서재까지 가는 모든 루트를 떠올린 글로르핀델은 방향을 틀어 급히 달렸다. 에레스토르가 도착하기 전에 막아서야만 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로드의 서재 근처의 정원으로 통하는 숲이었다. 모처럼 숨가쁘게 뛰었더니 차림이 엉망이었다. 조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턱 끝까지 차고 올라오는 숨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회의를 끝마치고 바쁜것이 좀 해결되고나면 다시 몸의 단련을 시작해야겠다고 에레스토르는 마음 먹었지만 그것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한가로이 운동이나 할 시간이 있을 턱이 없지. 그럼.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에레스토르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흐트러진 의복을 정리했다. 이윽고 흰색의 돌들로 꾸며진 서재가 눈앞에 보였다. 높은 천장을 가진 서재는 해가 잘 들수 있도록 크고 넓은 창을 넣어 설계한 곳이었다. 평소같았음 활짝 열려 빛을 들일 창들이 오늘따라 드문드문 닫혀있었다.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금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니까. 로드는 지금 그렇게 놀고 계실 시간이 없다고.. 그럴 시간이 있으셨으면 잠이라도 좀 주무셨으면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어젯밤까지 자신과 함께 밤을 꼬박 새다시피 자료정리에 몰두하신 터였다. 꾸벅꾸벅 졸고있는 자신을 따스하게 쳐다보시며 어깨를 두드려 이만 눈 좀 붙이라고 억지로 떠밀어 쫒아내신 분이셨다.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며칠을 일하고 계신 로드의 사정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쳐들어온 쪽이 나쁜 거였다. 주군의 가신이기 이전에 정말이지 염치없는 자를 몰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화가난 덕에 걸음걸이가 다시금 거칠어졌다. 이쯤되면 굳이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체면이 있고 염치가 있으면 접근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 쯤은 알아채겠지. 막 입구에 당도해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려던 찰나, 누군가 뒷쪽에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앗차, 너무 여유를 부렸군. 뒤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에레스토르는 다시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기 좀 서지?"
"댁 같으면 서겠어요?"
"응."
"전 아니거든요?"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달리는 에레스토르는 빠르지는 않았지만 워낙 작은 체구덕에 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하지만 잡아야 했다. 하여튼 남의 속을 알지도 못하면서. 혀를 차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재로 향하는 문으로 도착하기 바로 직전의 거리에서 글로르핀델은 에레스토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강하게 끌어당기며 발버둥치는 몸을 제압했다. 차라리 적이였다면 기절이라도 시켰을 텐데, 품안에 들어온 이는 아쉽게도 곱게 다루어야 할 린돈의 엘프였다. 흔들리는 주먹에 강타당한 옆구리의 고통을 지그시 참으며 글로르핀델은 에레스토르가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입을 막고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에레스토르의 몸은 허공을 날듯 앞으로 향했다. 설마 물어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던 글로르핀델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꽤 당황한 모습으로 달려가는 에레스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뒤따르려 했지만 저 제멋대로인 엘프는 과감하게도 추진력을 얻는 용도로 글로르핀델의 정강이를 사용해 버린 터였다.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버린 몸에 알싸한 고통이 뒤따랐다. 어이없이 당한 모습에 스스로도 우스운 듯, 혀를 차내며 글로르핀델은 다시 몸을 일으켜 뒤를 따랐다.

 

짜증을 내며 서재에 발을 들인 에레스토르는 기어이 자신의 로드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모습을 보자마자 무심코 부르려던 목소리가 어느순간 턱하니 막혀버렸다. 갑자기 멈춰버린 발걸음에 뒤따라오던 글로르핀델 마저 아슬아슬하게 제 자리에 멈춰버렸다. 멍하니 굳어버린 에레스토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아쥐던 글로르핀델은 시선을 돌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스란두일과 눈을 맞췄다. 무릎을 베고 누워 뒤척이는 엘론드를 감싸안으며 단호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젓는 오만함은 정말이지 화가 날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승리감을 충족시켜버린 찝찝함에 글로르핀델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억지로 당겨안으며 두 엘프는 서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경 답지 않게 조용하십니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말투로 말을 걸어보지만 굳어진 표정은 풀릴줄을 몰랐다. 나참, 정말 애라니까. 들리지 않는 작은 한숨을 쉬며 글로르핀델은 성큼성큼 앞지른 채 멈춰서 시선을 맞췄다.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섥힌 짙은 회색의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렀다.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자 겨우 열린 입에서는 여전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묻었어요? 엘프 처음봐요?"
"멀쩡하네."
"그럼 충격먹어서 울고불고라도 할 줄 알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날 뭘로 보고.."

시무룩해진 표정은 그대로인데 내뱉는 말에는 가시가 콕콕 들어박혔다. 하여튼 저놈의 자존심은. 글로르핀델은 다시금 웃어보였다. 눈 앞에 있는 어린 엘프는 기분이 나쁠런지는 몰라도 자신은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엘프를 본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서인지 너무나 신선했다. 매번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라니까.
허공을 바라보던 눈동자에 점점 생기가 돌아왔다. 촛점이 잡히며 자신의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글로르핀델이 못마땅한 듯 다시 인상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무어라 내뱉고 싶어하는 입술이 오물거렸지만 이내 꾹 다물리는 것을 확인한 글로르핀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 에레스토르는 그를 무심하게 지나쳐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왜 따라와요?"
"걱정이 되서."
"진짜 오지랖 넓은거 알아요?"
"어른으로서 당연한 거야."
"내가 앤줄아나. 내 나이가 몇인지 알기나 해요?"
"나보다 적겠지 뭐."
"저 바빠요. 가서 할일이나 하시죠. 글로르핀델 공."
"오늘 그대를 도와 자료정리를 하는것이 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젠장."
"지금 욕한거야?"
"제가요? 언제요? 기억이 잘 안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에 할말을 잃은 글로르핀델이 제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찔리긴 했지만 복잡한 머릿속에 짐을 더하고 싶지 않던 에레스토르는 이제 그만 좀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글로르핀델은 정말로 서가까지 쫒아올 작정인지 다시 에레스토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진짜 괜찮아?"

한참을 걷다 들린 목소리는 조금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퉁명스럽게 뭐가요. 받아친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들리길 바랬다. 곁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머릿속의 정리는 아까 서재를 나오면서부터 끝나 있었다.

"전하가 매번 짖궂으신 것만은 아니야. 물론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알아요."
"그래?"
"걱정이 된 것 뿐이에요. 며칠 밤을 꼬박 새우신 분이세요. 자기 안위는 생각도 안하시고 가신들만 챙기시는 분인데 평소처럼 생각없이 귀찮아 보이는 행동을 했더라면 정말로 가만 있지 않았을거에요."
"그래서 조금은 안심했어?"
"네."

불쾌하지만, 조금은 짜증이 났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모습에 수긍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신들의 걱정을 만류하시며 서류를 넘기시던 손이 힘없이 소파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무릎 위로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눈을 감으신 모습이 그토록 편안해 보인 적도 처음이었다. 며칠을 볼멘 소리로 청을 올려도 그저 웃으며 자신을 혹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편안히 감은 두 눈 위로 빛이 들까 손으로 덮어주는 배려에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은 질투가 났지만 어자피 자신은 그렇게 로드를 편안하게 만들어드리지 못 할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로드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실 수 있다면 자신은 그저 수긍하는 것 밖에 방법은 없었다.

"생각보다 회복하는 게 빠른걸."
"결과에 빠르게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린애나 보이는거에요. 이유야 어찌됐든 로드께서 주무실 수 있으니 그걸로 됐어요."
"다시봤어. 에레스토르."
"제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글로르핀델 공? 저는 허락해 드린 적이 없는데요?"
"아, 미안."
"됐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어자피 서가에 와도 도움이 안될 게 뻔하니까. 로드의 명이라 하셨으니 서재에는 당분간 가지 않을테니 안심하시구요. 그럼 이만."


제멋대로 툭툭 뱉어놓은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에레스토르의 뒷모습을 보며 글로르핀델은 웃어버렸다. 뭐야 저 꼬맹이. 진짜.
겪으면 겪을수록 재미난 아이였다. 순전히 버릇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또 속깊은 면모도 보이는 것이 제법이었다. 한없이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점점 더 호기심이 생겨갔다. 잠깐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머릿속이 간단하게 정리됐다. 도움이 안되도 어쩔 수 없지. 로드의 명을 따라야하는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천천히 에레스토르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새 곁에서 일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펴는 글로르핀델의 뒤쪽으로 엘크가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지나갔다. 오늘도 평온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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