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엘쌍. 밤

톨킨버스 2015. 7. 2. 23:20

"엘론드야."

반요정이라고 해서 보통요정들보다 덜 들리는것이 아니라고 수십번 이야기했건만 길갈라드는 늘 엘론드의 창 밑에서 평소보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곤 했다.

"네. 잘 들립니다. 대왕."

하도 고쳐지질 않는 터라 한번은 밖으로 나서지 않아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숨기랴. 낮보다 밤의 소리를 더 또렷히 듣는 요정.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덕에 더욱 더 예민해진 오감. 남들보다 배는 뛰어난 감각을 소유한 왕께서는 엘론드가 방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며 걷고 있는지, 따위를 즐거이 느끼며 더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댔었다.

"지친 이들의 휴식에 방해가 됩니다."
"허나 단잠에 취하기에는 아직 이른시간이란다. 그리고 별들이 쏟아지는 저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손해같은데?"

이렇게 들은척도 안하고 웃어보이는 왕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지. 엘론드는 의례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하고선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려갈까요?"

이불로 크게 몸을 감싼 엘론드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그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톡톡 끊어지는 목소리와 아직 졸음이 몰려와 어쩔줄을 모르는 눈꺼플.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써보고는 있지만 엘론드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노곤함에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만 주렴."

익숙하다는 듯, 엘론드는 테라스에 몸을 기울여 손을 뻗었다.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 이불뭉치가 바닥에 질질 끌려왔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 쭉 뻗은 팔은 왕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투박한 손이 그 팔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뭔가요?"
"토끼풀이란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손끝부터 타고 올라와 팔 전체에 퍼져나갔다. 이제는 익숙한 흔들거림에 엘론드는 제 손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얌전히 자리에 기대 앉았다. 밤은 깊었고 모두가 잠이 들었는데 왕께서는 여지없이 소꿉놀이중이시구나.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해서 혼을 내실것 같지는 않으니까. 흘끗 바라본 손목에선 부지런히 흰 꽃들이 엮어지고 있었고 한참 그것을 바라보다 잠이 든 엘론드의 머리칼이 넘실 불어온 밤바람에 부산스럽게 흩어졌다.

반쯤 엮어온 팔찌를 엘론드 손목에 맞추어 조절하고 매듭까지 끝낸 길갈라드는 고개를 들기도 전에 살랑이는 머리칼을 보고 또 잠이 들었다며 애석해 했다. 오늘은 좀 봐주지. 예쁘게 잘 되었는데.
퉁명스럽게 올려다보다가도 곱게 잠이 든 모습을 보면 또 기분이 좋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훌쩍, 난간을 받침 삼아 뛰어오른 몸이 가볍게 테라스에 안착했다. 얌전히 늘어진 아이를 들어 안으면 살풋 떠진 눈동자에는 푸른 별이 떠 있다 금새 사라지곤 했다. 잠결에 품을 파고드는 온기를 도닥이면서 방 안으로 들어서면 침대 한 구석에 오도카니 앉은 인영이 보였다.

"그러니까 아침에 주시면 되잖아요."
"새벽이슬이 닿으면 꽃이 더 예뻐지니까 꺾기 미안해지잖니."
"어자피 꺾일 꽃."
"인간은 언제든 죽겠지."
"꽃이랑은 다르게 인간은 생을 사니까요."
"꽃은 피어나는 것 자체가 생이란다."
"한 마디도 안 져주시네요."
"너도 그렇잖니?"

어느새 푹 잠이 든 엘론드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을 도닥이던 길갈라드는 엘로스를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안 예뻐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꽃을 말해달라니까?"
"싫어요. 득달같이 만들어올거잖아요."
"둘이 하면 예쁠텐데..매정한 엘로스. 불러도 오지도 않고."
"소꿉놀이는 사절이에요. 어린애도 아니고."
"아직도 내 눈에는 어린아이들이란다."
"아 그러십니까?"

볼멘소리로 툭 던져놓고선 보란듯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간 엘로스가 엘론드를 끌어안고 혀를 낼름거렸다.

"그럼 어린아이들은 잠이나 자야겠으니 대왕도 술주정 그만 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저희 키 안큽니다."
"저런저런.. 키가 크지 않으면 안되지. 가뜩이나 지금도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특히 엘로스 너는 더 안보이잖니."
"..키만 큰 꼰대같으니라고."
"뭐라 하였느냐? 늙어서 귀가 잘 안들리는구나."
"안녕히 주무시라 인사올렸습니다."
"오냐. 잘자거라. 린돈의 애기들아."

웃음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길갈라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큰 손을 들어 엘로스와 엘론드 두 아이들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 놓았다. 뒤척이는 엘론드. 싫다고 투덜대는 엘로스. 그 모습을 눈에 똑똑히 새겨 넣고서야 길갈라드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도 밝고 아이들은 잠을 자고. 나는 또 혼자로군."

키 큰 어른을 달래줄 것은 술 밖에 없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뚜벅뚜벅 걷는 발자국마다 포도향이 조금씩 묻어나왔다. 평화로운 린돈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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