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란엘. 불청객.

톨킨버스 2015. 5. 20. 23:35

엘론드는 답지않게 눈을 깜빡이며 몇 번이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아침에 제 손으로 닫고 커튼까지 꼭꼭 쳐낸 곳이었다. 따스한 기운이 감돌거라 예상하고 연 방문 안쪽에서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바람의 존재는 꽤나 당황스러운 것이어서 엘론드는 문을 닫는 것도 잊은 채 테라스 쪽으로 달려와 침입의 흔적을 찾았다.

누군가 들어오진 않은것 같은데.. 방 안을 둘러보며 사라진 물건이라도 있는건지 세심히 바라보고 있을 그 때에 다시 한번 방 안을 스친 바람에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할 때에 창문가에서 쑥 팔이 하나 올라왔다.

"너무 늦잖아."

말쑥한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의 대비가 엉망이라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불쑥 나타난 존재의 놀라움이 더 컸다. 엉겁결에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엘론드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태연하게 하품을 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벌떡 일어나 가볍게 테라스의 난간을 넘었다.

"오랫만이야, 엘론드."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인사하려 가슴께에 얹었던 손을 내미는 스란두일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뜻밖의 방문이자 뜻밖의 침입.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엘론드가 얼굴을 조금 굳힌 채 그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이런식으로 갑작스레 개인적인 공간까지 방문하는 건 그린우드의 방식입니까?"
"분명 말을 놓기로 한 것 같은데도 딱딱하게 대하는건 린돈의 방식이고?"
"스란두일."
"얼굴 굳히지 마. 못난 얼굴 망가진다."

저벅저벅 걸어 엘론드의 곁을 지나친 스란두일은 보란 듯 테이블로 다가갔고, 매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상식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은 엘론드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일단 의중을 알아보는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엘론드 또한 맞은 편 의자로 향했다.

"이전보다 키가 꽤 컸네?"
"그런 말을 하려고 온 건 아닐텐데?"
"못 올데 온 것처럼 말하긴."
"한낮에, 정식으로 와도 어려운 사이야."
"너와 내 사이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며 바라보는 눈에 진지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은 엘론드가 나직이 읊조렸다.

"솔직히 불편해."
"길갈라드가 눈치라도 주는거야?"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지 마."
"주군? 너의? 이봐 엘론드. 지금 뭐라고 말 하고 있는건지 알고는 있어?"
"알고있어."
"하...."

성년식은 내일이었고 아마도 그 때에 모두들 알게 될 사실이었다. 반요정 엘론드는 놀도르의 군주이자 상급왕인 길갈라드를 주군으로 모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입 밖에 내지 않은 혼자만의 계획이었는데 어쩐지 불쑥 나와버린 말 한마디에 스란두일의 얼굴은 금새 굳어졌고 엘론드는 당혹스러워 했다. 자신의 선택과 거취여부에 많은 시선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한껏 조심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어?"
"...응."

자칫 심각해져버린 분위기에 엘론드는 늦은 밤 함부로 자신의 처소를 찾아온 스란두일의 힐난하는 것 조차 하질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말 없이 앉아있던 스란두일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고, 덩달아 긴장한 엘론드는 자세를 바로한 채 스란두일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맘에 안들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린우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최전방이라? 신다르보다 놀도르가 더 유리하고 탄탄한 입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그런 건 아니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분하기까지 한 얼굴로 똑바로 바라보는 스란두일의 시선을 받으며 엘론드는 슬쩍 자세를 풀어내렸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스란두일은 납득하지 않을 기세였다. 계속 그린우드와 황금숲. 이곳저곳의 귀족들에게서 오는 서신들은 엘론드를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시하거나 얕봐서가 아닌 스스로의 일생을 위해 가장 합리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내렸던 것 뿐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묻는 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못한 엘론드는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답은 내려지지 않았고 눈 앞의 스란두일은 인내심이 길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주는거야?"
"아니."
"....."
"쓸데없는 일에 더 힘을 빼고 싶지 않은 것 뿐이야. 앞길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랬고 나는 어자피 네게 이방인일 뿐이지. 선택을 했다면 막아설 명분은 없어. 그러나 조금 기분이 언짢은 건 어쩔 수 없네."
"미안."

저도 모르게 사과를 해버린 입술이 금새 굳게 닫혔다. 사과할 일 까지는 아니었는데.

"왜 사과를 해? 넌 잘못한 게 없어."
"그렇네.."
"어쨌건 내 기분이 나쁜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혼자 기대하다 혼자 어그러진 거니까."
"어쨌든 내가 연관된 일이잖아."
"그건 부인할 수 없지. 아버지는 조금 슬퍼하시겠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몸이 주욱 늘어져 탁자위로 미끄러졌다. 엉거주춤하게 엎드린 자세에서 불쑥 얼굴만 들어 바라본 스란두일의 표정은 맨 처음과 같아졌다.

"중요하긴 하지만 별로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굳이 먼저 들으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그러고보니 왜 온거야? 그것도 이 밤중에."
"볼일이 있어서 왔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럴거면 서신을 먼저 보내고.."
"벌써 잔소리쟁이인 놀도르인 척 하는거야?"
"..기본 예의를 말하는 거야."
"그런 딱딱한 예의는 별로 지키고 싶지 않아. 보고싶을 때 친우의 얼굴을 보러 오는 것이 뭐가 나빠? 엘론드는 내가 보고싶지 않았어?"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 같아."
"깐깐하긴."

미적대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 스란두일을 보며 엘론드는 답답해졌다. 내일 있을 성년식을 대비해 일찍 잠들려는 계획이 허사가 되어버리기도 했고 목적을 달성한 뒤 스란두일의 거취를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는 것은 꽤 머리가 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 방에서 재워야 하나? 일국의 왕자를 그렇게 재워도 되나? 손님용 방을 멋대로 쓸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엘론드의 표정을 바라보던 스란두일이 히죽 웃어보였다. 뭘 믿고 저렇게 웃는거야.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린 엘론드가 뭐라고 이야기라도 한마디 하려는 찰나 벌떡 하고 스란두일이 일어나 앉았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해. 엘론드."
"...뭐?"
"지금 방금 에아렌딜의 배가 정점에 도달했어."

끄트머리로 보이는 테라스 너머의 밤하늘을 가리킨 스란두일이 엘론드에게 웃음지었다. 그 틈새로 희미하지만 밝게 빛나는 별빛. 아버지의 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손 끝과 밤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다 엘론드는 스란두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어른이 된 걸 축하해 주고 싶었어."
"..고..마워."
"제일 먼저 축하해 준 것 맞지?"
"응.."
"다행이다. 몰래 온 보람이 있네. 아버지였으면 당장에 사절을 꾸려라 선물을 보낸다 난리를 쳤을거야. 그건 너도 싫을 거 아냐. 안 그래?"

얼떨떨한 표정으로 끄덕이는 엘론드를 앞에둔 채 스란두일은 푸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차고온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던 손 끝은 어느새 엘론드의 앞으로 작은 유리병 하나를 밀어냈다.

"원래 성년의 날에는 향수를 선물 받는거야. 이건 내가 직접 널 위해 조향했어."
"...이런 걸 받아도 돼?"
"왜 안돼? 놀도르가 되기로 한 이상 신다르의 선물은 받을수 조차 없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받아 둬. 귀한 거니까. 어딜가서 그린우드의 왕자 선물을 받아 보겠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유리병은 고급스런 그린우드의 문양으로 감싸져 있었고 그 속에는 반투명한 붉은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두 손에 가볍게 들어오는 병을 쥔 채 엘론드가 한참 바라보고만 있자 스란두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병을 빼앗고 마개를 손수 열어주었다.

"어때?"
"..나쁘지 않아."
"선물을 받으면 고맙다. 한마디면 되는걸."
"고마워."
"어 그래."

시키는 대로 답하는 것이 우스운 지 스란두일은 여전히 혼자 웃으며 도로 엘론드의 손에 열린 유리병을 들려주었다.

"아껴써. 귀한 재료로만 만든 거니까."
"그럴게."
"성인식의 첫 축하도 내가했고 첫 선물도 내가 줬네. 어른이 된 기분은 어때?"
"...그런게 어딨어. 그냥 똑같지."
"하긴 넌 어린애일 때도 어른스러운 척 했지."
"어린애가 뭐야."
"방금 전까지 어린애였거든요."
"먼저 성인 되었다고 자랑하는거야?"
"당연하지. 원래 일년을 먼저 태어나더라도 먹은 밥 차이가 난다고 했어. 하물며 삼년인데 솔직히 너무한거 아니야?"
"고작 삼년 가지고. 티끌만한 차이로 어른인 척 하고있어."
"어라 이것봐라? 아직 성년식도 치루지 않은 어린애가 어른앞에서 말버릇 좀 봐."
"내쫒는다?"

푸흡 터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까지 잡고 넘어간 모습을 보면서 엘론드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의 거취를 정하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고작 어른이 된다며 선물을 준비하고 이렇게 몰래 찾아와 축하까지 해줄 이가 있을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순수하게 어른이 된다는걸 축하해주는 이가 있다니. 새삼 고맙고 부끄러웠다. 이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홀로 성인식을 맞을 동생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상해."
"뭐가?"
"축하를 받는다는게."
"당연한거야."
"그런거야?"
"응."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여. 그럴 자격 충분해. 라고 말해주는 스란두일이 정말로 이상했다. 어쩐지 시큰해지는 눈가를 빠르게 문지르며 엘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의 불청객은 감정도 휘두르는데 능하다고. 이상한 요정이라고. 계속 곱씹으면서 엘론드는 웃어보였다. 친우라 불러주는 이가 웃으라 했으니, 웃어도 되지 않을까 했다.

"웃으니 좀 낫네."
"너보단 좀 낫지."
"어어? 그건 아니지?"
"오로페르님이 그러셨는걸, 내 아들보다 낫다고."
"우리 아버지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스란두일을 보며 엘론드는 소리내어 웃었다. 웃냐? 이봐 반요정. 아무리 니가 루시엔의 후손이라도 이건 아니지! 거울 보고 이야기를 해볼까? 우다다다 쏘아대며 손가락질 하는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점점 그 웃음소리와 섞였다. 밤은 깊어갔고 자기에는 이미 글렀고, 불청객과 밤새 투닥이는 수 밖엔 없겠다고 생각한 엘론드의 목소리가 도로 커졌다. 시끄럽고도 이상한,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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