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깃든 집무실에서 마악 떨어진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늘어졌다. 한참 침실로 향하던 걸음걸음이 문득 멈추어졌고 그림자의 주인은 그대로 고개를 틀어 창가에 늘어진 또다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난간에 걸터앉아 이 쪽을 주시하고 있는 금발의 사내는 여느때와 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랫만이야."
"오랫만이라기엔 너무도 태평한 얼굴이군."
"그럼 감격해서 울기라도 할까봐서?"
"적어도 해가 떴을 때,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서 들어올 순 없어?"
"숲은 밤과 낮이 늘 다르지 않아. 같을 때도 있지. 내가 살고있는 곳에서 낮이라 생각했기에 말을 달린 것 뿐이야. 네가 있는 곳의 사정까지 돌아봐야 하나?"
"그만그만, 거기까지."

입씨름에서는 늘 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엘론드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허울뿐인 창을 열어제쳤다. 허락받지 않은 불청객이었으나 이러는 경우가 한 두번 이던가.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임라드리스가 뒤집어지겠지만 어쨌거나 생경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가 이런 시각에 찾아오는 이유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엘론드는 알고 있었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단숨에 복도 안쪽까지 들어온 침입자는 어깨를 나란히 하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앞장서 엘론드의 침실로 향했다.

그는 성급하게 구는 법이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침대 옆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양껏 품 안에 들고 온 서류를 차곡차곡 책상위에 올려두고 땋인 머리를 하나씩 풀어 몸 정리까지 마치고 나서야 침의로 갈아입은 엘론드는 사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끌신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침대 위로 올라올때까지 금발의 사내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그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완전히 올라와 자리를 잡고나서야 매섭게 쫒아다니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달빛이 훤하게 비추는 침실. 그 빛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빛나는 머리칼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흐트러졌다. 어느순간 엘론드는 짓눌려있었고 뜨겁게 열기를 품은 손 끝이 어깨를 틀어쥐고 있는 것을 느꼈다.

"밤은 길어."
"길지 않아."
"스란두일."
"엘론드. 나를 사랑해?"

순간 말문이 막혀 답하질 못했다. 후두둑 쏟아져 빛을 차단한 머리카락이 귀와 목을 간질여댔다. 그보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너를 사랑하냐고? 스란두일 너를?

"..사랑해."

조금 더듬거리긴 했어도 나는 분명하게 말 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나는 그를 사랑하기에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도 나와 어울렸던 거였을텐데...?

"아니, 넌 날 사랑하지 않아."

텅 비어버린 천장이 보였을 때,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 보다는 아픔이었다. 어깨를 틀어쥔 손끝이 갈고리처럼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고통에 비틀린 몸뚱이가 더듬거리며 올라와 어깨를 쥐어 뜯었다. 그러나 의외로 순순히 떼어진 손가락은 다시 그 안에서 도망쳐버렸다.

"증명해볼까?"
"스란두일!"

잔뜩 일그러져 굳은 얼굴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어째서.

스란두일은 천천히 자신의 옷을 흐트러뜨렸다. 다리 사이에 엘론드를 가둔 채 스스로 옷을 벗어 던지며 스스로 환한 빛이 된 몸뚱이가 눈 앞에 있었다. 그 빛무리가 늘어져 손 끝에 머물렀고 그 끝은 천천히 엘론드의 침의로 향했다. 손쉽게 풀어낸 허리끈에 엘론드의 옷 또한 흐트러졌다. 가만히 눈을 떠 스란두일을 바라보던 진갈색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리워졌다.

흠칫, 놀라며 손을 뻗어보았으나 노련한 숲요정의 손놀림은 무방비상태의 시야를 차단하는데에 성공했다. 그다지 단단히 묶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엘론드는 함부로 그 위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보이지 않아 허벅지에 닿은 무게가 한결 생생하게 느껴졌다. 더듬거리며 뭔가 말을 해보려 노력했지만 순식간에 닿아오는 타인의 입술에 엘론드는 그저 얌전히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느긋하던 입맞춤과는 다른, 조금은 급히 몰아붙이는 템포에 헐떡이며 몸을 틀었다. 익숙한 체향과 손길에 길들여진 몸은 이내 쉽게 풀어졌고 여즉 그래왔던 것 처럼 엘론드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눈을 가리웠다고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늘 그랬듯, 스란두일은 입맞춤을 하고 난 뒤 버릇처럼 코나 턱 끝을 물 것이고 허리를 감아 끌어당길 것이라는 걸 엘론드는 알았다. 그러나 조금, 아주 조금 불안했다. 빛도 들지 않게 캄캄해진 앞. 고작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이토록 불안해질수도 있구나. 조급한 마음에 엘론드는 먼저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아 올렸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입술이 급하게 떼어져 바깥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엘론드는 그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엘론드."

....이름이었다. 늘 자신을 부르던 이름. 이름 일 뿐이었다. 그런데...

"엘론드?"

굳어버린 몸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닿아오는 머리칼 한올한올이 온 몸을 자극했다. 소름이 돋았다. 덜덜 떨리는 손 끝이 부여잡은 허리를 옭아맸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얼굴. 그리고 입술. 귓가에 속삭여지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 다시 한번.

"엘론드야."

황급히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차마 눈 앞을 볼 자신도 없었다. 얼굴을 감싸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몸이 그대로 끌어안겼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 이었다. 웅크린 채로 몸부림채며 엘론드는 그 품에서 벗어나길 희망했다. 그러나 안대는 벗길 수 없었다. 울컥울컥 젖어드는 눈가에 덩달아 얇은 허리띠도 얼룩졌다. 뒷머리에 닿아오는 뜨겁고 커다란 손이 너무도 서러웠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거짓말은 하면 못 써. 스란두일은 꽤 낮은 목소리로 엘론드를 힐난했다. 힐난. 그래 힐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엘론드는 비참해졌다. 그러나 그 비참함을 토로할 곳이 없었다. 느긋하게 닿아온 하체가 얽혀 부벼졌고 생리적인 감각에 엘론드는 신음했다. 품에 안겨 신음을 뱉고 어깨와 정수리에 닿은 입술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다리가 벌어지며 찬바람이 들고, 그 은밀한 곳에 닿는 손 끝이 너무도 생경하게 와 닿았다. 더더욱 무서워진 몸이 처음으로 진입을 막아섰다. 도리질치며 벌어진 입술에 스란두일은 되려 키스했다. 두터운 혀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놀림을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엘론드는 겁에 질려 있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봐.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완전히 낮아진 목소리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엘론드는 도리질쳤다. 스란두일은 나를 사랑했고 나도 역시 스란두일을 사랑했다. 적어도.. 적어도 그 마음만은 진짜인데...

"스란두일..."
"....."
"스란두일. 제발."

침묵하는 몸. 스산한 바람소리가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엉거주춤하게 몸을 안아든 온기만이 자신을 향해 부르짖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서, 들리고 느낄수만 있어서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대체 눈 앞에 있는 몸이 누구의 것이길 바라고 있는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띄엄띄엄 내뱉어진 말이 끝나자마자 안대가 벗겨졌다. 후둑 떨어진 고여있던 눈물이 툭 툭 흘러내렸다. 새파랗게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눈. 그리고 그 속에 가두어진 나. 엘론드는 반사적으로 그를 끌어 안고 얼굴을 묻었다.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무슨 낯으로 내가, 널. 그런 눈으로.

"고개 숙이지 마."
"....."
"네가 누군가를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는 건 상관없어. 그건 오로지 네 맘이야. 하지만 내 눈을 피하지는 마. 적어도 넌 내가 그 마음에 들어갈 수 있게 문은 열어두었으면 해. 그게 내가 네게 바라는 단 한가지야."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몰라."
"상관없어. 그 녀석도 단숨에 들어가지 못했다는거 알고 있어."

깊숙히 끌어안은 품 안에서 익숙한 살내음이 났다. 왈칵 눈물이 돌아 어깨 위를 적셨다. 그제서야 내가 그와 함께 밤을 보냈을 때, 어떤 눈으로 쳐다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는데..

"당연히 오래 걸릴 일이야. 요정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때로는 그 기억이 평생을 괴롭힐 수도 있어. 아직은 이 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걸."
"그게 전부는 아니야. 나는..!"
"알아. 알고 있어. 그렇지만 네가 노력하는 만큼 나는 더 조급해져. 하루라도 빨리 널 온전히 갖고 싶어. 네 시선에서 나와 다른 녀석이 번갈아 보이는 걸 더 이상은 보고싶지 않아."
"........"
"질투해서 미안해. 재촉해서 더 미안해. 그렇지만... 그만큼 널 더 사랑해."

슬쩍 밀쳐져 마주한 얼굴이 엉망이었다. 잔뜩 젖어버린 금빛 속눈썹이 몇 번 무겁게 깜빡였다.

"사랑해 엘론드."
".........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천천히 다가온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아 엘론드를 물었다 놓았다.

"나중에, 나중에 온전한 대답을 들려줘."

겹친 코끝을 부비며 감았다 뜬 눈의 푸른 호수가 파도치듯 흔들렸다. 그 파도에 슬쩍 밀려났던 것처럼 엘론드가 황급히 다가와 스란두일을 부여잡았다. 한숨처럼 뱉어진 신음. 다시금 엉킨 다리. 평소와는 다를게 없는 그 와의 밤이었지만 엘론드는 어쩐지 눈을 감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에 눈을 덮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별빛이 보일까봐서. 그래서 눈 앞에서 찬란히 빛나는 태양이 가리워질까봐서.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도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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