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대로라면 안나타르는 눈웃음을 흘리며 스란두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긴 카우치 위에 앉아 가만히 턱을 괴고 바라보며 장난을 거는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피로가 쌓여 주무시고 계시다는 시종의 이야기에 스란두일은 좀더 거칠게 내딛는 발을 쿵쿵 울렸다. 아홉겹의 휘장. 새까만 커튼이 내려앉은 그의 안쪽. 불현듯 떠올려버린 진실에 소스라치듯 놀란 마음이 덩달아 쿵쿵 울렸다. 안나타르는 모르도르의 주인이며 꽃이라 불리우는 사내. 누구에게나 웃음을 팔고 사랑을 팔았다. 그것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여기면서도 스란두일은 마치 그를 연인 대하듯 품었다. 그 사랑이 갈 곳은 한 곳 밖에 없었는데.

스스로가 우스웠다. 말려들었구나. 그의 꿀 같은 속삭임에 날개를 적셔버렸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나는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없던 긴 회랑엔 방을 지키고 서있는 시종들이 그득했다. 그만큼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지고 아려왔다. 성의 주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서슬에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마지막 시종의 얼굴을 위아래로 훝으며 스란두일은 굳게 닫힌 문을 두 손으로 밀어제쳤다. 달콤한 향이 피어오르고 빛 한 조각 들지않는 곳, 안나타르의 침실이었다.

새까만 머리칼에 파뭍히기라도 한 듯, 안나타르는 잠들어 있었다. 잠들 때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며 흘리듯 속삭인 말은 진실인 듯 했다. 아무렇게나 펼쳐져 휘감긴 얇은 이불은 그가 숨 쉴때마다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상기된 뺨과 목. 열이 있는 듯 해 뻗어진 손 끝이 이마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안나타르의 눈이 떠졌다.
변명을 할 새도 없이 두개의 시선이 맞닥뜨렸다. 한참을 바라보다 몇번을 깜빡인 붉은색 눈동자는 그제서야 앞의 엘프가 누구인지 알아챈 모양인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스란두일은 무심히 그대로 손 끝에 힘주어 그를 눕혔다. 오래지 않아 다시 베게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슬그머니 쓸어내린 안나타르의 입술이 열렸다.

"이곳까지 어인일이십니까."
"아프다 들었다."
"별 일 아닙니다. 조금 피로가 쌓여 쉬고싶다 일렀을 뿐입니다."
"열은 없는데."
"다 내렸다 하질 않습니까. 아픈 것이 아닙니다."
"..."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를 슬쩍 한 쪽으로 몰아 가다듬고는 막무가내로 스란두일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그 서슬에 놀라 벨트를 부여잡은 손을 막은 스란두일은 안나타르에게 무슨 짓이냐며 소리를 높였다. 잠깐 머뭇거리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오늘은 입으로 해드리지요. 도저히 흥이 나질 않아서요. 그게 싫으시면.. 허벅지에라도."
"누가 하고 싶어서 왔다 했느냐?"
"그럼 왜 절 찾으셨습니까?"

평소처럼 돌아온 목소리. 동그랗게 떠진 눈이 스란두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잡혀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스란두일 또한 몸에 열이 올랐다. 말문이 막힌 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시선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가만히 움켜쥐었던 손을 제자리에 놓고 안나타르를 자리에 뉘인 스란두일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자신을 향해있는 시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몇 번이고 말을 고르던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걱정이 됐다."
"...제 걱정입니까?"
"여기에 아픈이가 또 있더냐."
"예하."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지금은 듣기 싫으니까."
"스란두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시선이 안나타르를 찍어눌렀다. 일국의 왕자의 이름은 쉽게 불리라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조금 저자세를 보였다 해서 이리도 방만하게 구는것인가.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다 침실에서만큼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것을 허락했다는 것이 기억난 스란두일은 곧 사나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천천히 다가온 손끝이 스란두일의 손을 어루만졌다.

"처음입니다. 이리 걱정해주신 분은."
"..내 앞에서 다른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릴 셈이냐."
"그럴리가요."

기뻐서 그럽니다. 순수하게 주억거리는 말틈에 웃음이 숨겨져 있었다. 다시 시선을 피한 얼굴이 이번엔 조금 풀어졌다. 여전히 스란두일의 손 끝을 만지작거리며 안나타르는 말을 이었다.

"조금 피곤합니다."
"얼굴을 보았으니 이제 되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성큼 일어나려는데 손이 끌려오질 않았다. 강하게 부여잡고 있는 안나타르의 손이 절로 딸려 올라왔다. 다시 내려다 보는 스란두일에게 안나타르는 평소처럼 야살을 부리는 모습이 아닌 수줍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구한 부탁입니다만, 잠 들때 까지만이라도 곁에 있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꿈을 팔고 온기를 파는 곳에서 날더러 시중을 들어달라."
"그리하면 아니됩니까."

버릇없는 말투였지만 잡고있던 손이 떨려왔다. 오늘따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간단히 뿌리치면 될 작은 힘인데 어째서인지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필시 열이 오른 목소리 탓이리라. 실없는 생각을 이으며 한참을 고민하던 스란두일은 그의 손을 놓고 말없이 로브를 벗었다.
겉옷을 벗고 간단한 차림으로 스란두일은 안나타르가 누워있던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옷깃에 스민 한기에 기분이 좋은지 안나타르의 손 끝이 스란두일을 더듬어 올랐다. 하지만 그 마저도 오래지 않아 제지당했다. 얌전히 양 손을 그러모아 배 위에 온전히 놓아둔 스란두일이 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눈을 붙이거라."
"어린아이라도 된 것 같습니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얼굴은 새빨갛게 되어선. 어린아이라 해도 믿겠구나."
"예하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것은 아닐런지요."

올려다보는 시선의 붉은색은 변함이 없었건만, 그 속에 담긴 물음은 일전의 눈물을 떠오르게 했다.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스란두일이 큰 손으로 그 눈을 덮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거라."
"잠이 들면 가실겁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더듬거리며 얼굴로 올라와선 눈을 가린 손 끝을 움켜쥔 안나타르는 그대로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다섯 손가락의 끝에 조심히 입을 맞추며 스란두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때보다 맑아보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예하."
"..좋은 꿈 꾸거라."

오랜 시간 함께 밤을 보내면서도 인사를 건네본 것은 처음이었다. 살풋 휘어지는 눈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다시금 자신을 현혹하는 요망한 눈을 가렸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손 위에 안나타르의 손이 얹혔다. 성의 가장 깊은 곳, 모르도르의 주인이라 불리우는 자의 침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간신히 들리는 침대 위에는 어느새 두 명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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