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고 싶어서."

몇 십년 만에 찾아온 이는 살갑게 인사를 할 새도 없이 한마디 툭 던져놓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소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리븐델의 군주는 아무말 없이 꽤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당황하며 안절부절하고 있는 가신들에게 동편 가장 높고 넓은 방을 준비시키라 명한 엘론드는 살뜰히 여독에 지친 어둠숲의 전사들까지 챙겼고 할 일들 배정받은 인원이 뿔뿔히 흩어지고 나서야 테라스에 멍하니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숲의 왕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같이 산책이라도 하겠는가?"
"그러지요."

꼿꼿하게 세워진 등과 평소같은 시큰둥한 표정은 무심하고 귀찮아 보였음에도 스란두일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불시의 방문에도 늘 자기집인것 같은 당당한 모습에 속으로 웃어보인 엘론드는 더 이상 거리가 벌어지게 전에 그가 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븐델의 겨울. 새하얗게 내려앉은 눈꽃은 나뭇가지를 꽃피웠고 투명한 햇살을 반사하는 얼음들은 은밀한 계곡을 더욱 신비롭게 감쌌다. 봄이 지척이건만 아직까지 입김을 불면 뽀얗게 피어나는 한기는 가벼운 차림의 두 엘프로드의 귀 끝을 붉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먼저 길을 잡는 이의 발걸음은 도통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스란두일은 이렇게 기별도 없이 훌쩍 리븐델을 찾았다. 가을이 보고 싶어서. 찬란한 햇살이 보고 싶어서. 꽃들이 보고 싶어서. 이유는 다양했지만 매번 달랐고 시기도 제각각 이었다. 처음에는 뜻하지 않은 방문에 매우 당황했었지만 이제는 이런 자유분방함 또한 익숙해졌다. 하기사 이렇게 제멋대로 먼저 찾아오는 일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어지러운 시기에 마음 편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만드는 일조차 엘론드는 만들 수 없었을 터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함께 걷다보면 상대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는 볼주머니 가득 도토리를 깨물은 다람쥐를 관찰 할 때도 있었고, 맑은 소리를 내며 얼음 사이를 흘러가는 냇물을 한참이고 주시하기도 했다. 계곡 굽이굽이 노랫소리가 흐르고 다정함과 온기가 가득한 리븐델. 같은 것들이 있지만 또 전혀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둠숲을 알고 있는 엘론드는 그가 이렇게 찾아올 때 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함께 길을 걷곤했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저 지나버린 영광을 그리워 하는 걸까. 한번도 묻지 못한 질문은 늘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러나 스란두일 역시 그 긴 세월동안 한번도 입을 열지 않은 채, 함께 산책하는 시간만을 온전히 즐겼기에 그 질문이 서로의 입 밖으로 나오는 법은 없었다.

긴 산책이 끝나면 그때부터 진짜 손님 맞이가 시작되는 법이었다. 스란두일은 가신들을 시켜 간단해 보이는 짐들 속에서는 귀한 술들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으로 지체된 로드의 일정을 끼워맞추다가 옮겨지는 '선물'들을 발견하곤 낭패감에 부들부들 떨리는 에레스토르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리며 엘론드는 그저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일정을 비워줘야겠네. 울상인 모습으로 무어라 항변하려는 것을 앞서 가로채 데려가는 글로르핀델의 눈웃음을 받으며 엘론드는 기지개를 펴 몸의 무거운 기운을 털어냈다. 제멋대로 쳐들어온 손님은 어자피 구슬리거나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 이렇게 된 이상 몸도 마음도 편히 늘어지고만 싶었다. 자잘한 일들을 마무리지은 엘론드의 발걸음이 동편 서재로 향했다. 오랫만의 휴식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실컷 보셨습니까?"
"아니,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사방에 널린것이 눈이니 질릴만큼 가득 담아가시지요."
"내가 바라는 것은 함부로 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낮부터 이어진 술자리 덕분에 대화소재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종래에는 대개 그러하듯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가벼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여전히 두리뭉실한 대답에 엘론드는 말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워진 잔을 채워주었다. 굳이 말 하지 않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에 스란두일은 조용히 웃으며 열린 창에서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다가와 부드럽게 잔을 감아쥐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놀랄만큼 우아해서 엘론드는 의자에 기대어 저도 모르게 도톰하게 오르내리는 목울대를 주시했다.
절로 올라가는 시선의 끝에는 시리도록 찬 기운을 내뿜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자신을 힐책하고 위협하는 것 같은 드넓은 바다. 폭풍의 기운을 품고 있는 다정한 존재. 실례라는 것을 잊은 채 엘론드는 그 바다를 한참동안이나 주시했다. 그러다 퍼뜩 넋을 잃고 바라본 그것이 스란두일의 눈동자라는 것을 깨달은 엘론드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자신의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따랐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 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쩐지 귓가에서 파도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대는 원하는 것이 없나?"

침묵을 깬 스란두일의 목소리는 단아했다. 낮부터 술잔을 기울였는데 마신 술의 향기조차 배이지 않은 단정함에 엘론드는 기분이 묘해졌다. 아까부터 조금씩 올라오는 열기에 흔들리고 있는것은 자신 혼자 뿐인 것 만 같았다.

"그런 것이 있어야 합니까?"
"자네는 대관절 무슨 재미로 숨을 쉬고 이 생을 살아가는지 궁금해."
"그런 욕구가 들지 않는다 해도 살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바다는 어떠한가. 자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나?"

속내가 들킨 모양새로 화들짝 놀란 엘론드가 스란두일과 눈을 마주쳤다. 동요하듯 일렁이는 바다. 그 곁에 선 이 조차 두근거림을 갖게하는 광활함. 이런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진득하게 주시하는 모습에 엘론드는 늘 스란두일에게 어려움을 느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늘 남을 바라보고 관찰하며 살아온 자신에게 이렇듯 반대로 관찰당하는 시선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한동안 넋을 놓고 질문을 곱씹던 엘론드의 입술이 어렵게 열렸다,

"바다의 속삭임에서 자유로운 요정도 있습니까."
"그대 입으로 방금 욕구가 없다고 했으면서."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해진 답이 있을리 없잖나. 그대가 원하는 것을 물었으니 답은 그대가 알고 있겠지."
"그럼 반대로 물어보죠. 당신은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눈이라고 했잖아?"
"..네?"
"불멸의 삶이라고 해서 원하는 것이 하나일 리 없지. 시시때때로 변하기도 하고 특정 한가지가 오랜시간 머릿속을 점령하는 경우도 있어. 자네는 안 그런가?"
"..그래서 그 눈을 보기 위해서 이곳까지 오셨다고요."
"남는게 시간이니 이런 사치정도야 소소한 것 아닌가."
"원하시는 대로 늘 하실 수 있는 점 하나는 부럽군요."
"누가 자네에게 하지 말라고 명령이라도 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
"축복받은 일루바타르의 자손이라 해도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것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요."

잠시 목을 축인 엘론드는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요정은 상실이라는 감정을 아예 몰랐을겁니다."

새로운 병을 따내며 제멋대로 잔을 채우는 엘론드를 바라보며 스란두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늘히 굳힌 미간의 주름이 누군가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잔을 빙빙 돌려 향을 퍼지게 만들던 엘론드의 잔을 빼앗은 스란두일의 손은 망설이지 않고 엘론드의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두서너걸음 앞질러 가는 그 버릇은 술을 마셔도 변하는 법이 없지."

불시의 기습은 기분나빠할 겨를도 없이 헛웃음으로 번졌다. 이 나이 먹고도 딱콩을 맞을 줄은 몰랐지. 경미한 고통이 번지는 이마를 몇번 문지른 엘론드가 앞에서 무뚝뚝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스란두일을 바라보았다.

"번번이 절 휘두르려 드는 당신만 하겠습니까."
"이제는 남의 탓까지 하는군?"
"취했나 보지요. 말꼬리를 잡고 늘이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간만의 술자리라 몸이 따라주질 않나 봅니다?"
"남의 일인양 이야기하는 버릇도 버릇이지만 그 늙은이 행세는 그만둬. 쉽게 인정하는게 더 재미없어. 알아? 차라리 취하지 않았다고 우겨볼 생각은 들지 않는거야?"
"설사 우긴다고 해도 당신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런 자리에서조차 절 질책하는 이는 당신밖에 없을테니까".
"그리웠다고 돌려 말하지 말게. 좋아할지도 몰라."

농담처럼 던져진 말에 엘론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희미하게 감돌고 있는 웃음에 덩달아 마음이 풀어진 엘론드는 우울한 생각들을 단숨에 털어버리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그리웠다고 고백하면 좀 더 자주 오십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절대 말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끄러우니까요."

풀린 얼굴근육이 보기좋은 모습을 만들었다. 취기가 돌아 어지러운지 엘론드는 탁자에 턱을 괴고 마주한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되려 미간을 찌푸린 것은 스란두일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나를 설레게 만들지?"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꽤나 좋은 핑계이질 않습니까."
"이건 뭐 대놓고 유혹이군."
"그런 점을 이용하는 당신이 제일 나쁜거 아닙니까?"
"나는 원래 성격이 이러니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던지는 말에 엘론드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스란두일 역시 활짝 웃고 있었다. 몇 백년을 이어져 온 이상한 방문.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제멋대로 쳐들어와선 까다로운 요구가 많은 어둠숲의 군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는 좋은 타이밍과 좋은 시기에 맞추어 방문한다는 것을 엘론드는 알고 있었다. 한없이 피곤하고 모든걸 놓아버리고 잠들고 싶을 무렵에만 귀신같이 찾아오는 손님은 딱딱한 듯 보여도 배려를 할 줄 알았고 제멋대로인척 자신을 휘두르면서도 오랜 친우처럼 곁에 있어주었다. 한바탕 크게 웃어버리고 개운한 표정을 짓던 엘론드가 슬며시 눈을 감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더 이상은 정말로 안되겠습니다. 내일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내게는 좋은 일이로군. 그대가 깨어날 때 까지 품에 안고 괴롭혀 줄 수 있을테니 말이야."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기 싫어서라도 일찍 일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가슴아픈 말을 내뱉는 입술과 착한 손의 밸런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오늘의 마지막 잔이라는 의미겠지요. 따라주시겠습니까."
"미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빼앗긴 잔 대신 스란두일의 빈 잔을 움켜쥔 채, 엘론드는 배시시 웃었다. 상기된 얼굴, 기분 좋아보이는 웃음. 건배를 제의하는 엘론드의 모습에 한숨처럼 단숨을 내쉰 스란두일이 못 이기는 척 잔을 들었다. 흔들리는 잔 속에 푸른색과 청회색의 눈동자가 어룽거렸다. 그리고 한순간이나마 둘은 짧게 겹쳤다.


 

◈ ◈ ◈

 


의자에 기대어 눈감은 엘론드의 얼굴을 바라보던 스란두일은 부축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추켜세웠다. 슬쩍 품에 안고 겹친 온기를 온전히 지탱하고서야 얼굴에는 다시 희미한 웃음이 어렸다. 새벽의 한기가 몸에 스쳤는지 엘론드는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고, 온전히 서로를 끌어안게 된 두 요정의 몸은 짝이라도 되는 것 처럼 꾹 맞물렸다. 태평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기대했었는데. 너무 큰 기대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연중 무언가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에 스란두일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대의 말이 맞아. 엘론드. 무한한 생명을 가졌다고 해도 가질수 없는 것은 있기 마련이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던 손 끝이 엘론드의 이마선을 따라 관자놀이에 닿았다. 곱게 감겨진 먹색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스란두일은 조용히 속삭였다. 눈을 보러 왔어. 엘론드. 하지만 엘론드는 고르게 안정된 숨을 내쉬며 조금 몸을 움직였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눈감은 이여. 어찌하여 나를 보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어쩐지 마음은 편해졌다. 오늘로 부족하면 내일도 보고, 내일로도 부족하면 만족할때까지 마음에 담으면 될 일이니까. 리븐델의 현자의 조언은 여간해서 틀리는 법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스란두일은 점차 기울어지는 자세를 고쳐잡고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은 눈을 뜨자마자 눈을 보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대로 해야겠다며 조용히 웃는 그림자 사이로 새벽의 별빛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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