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과 같은 밤이 지난 후의 시간은 아득하니 빛나기 마련이었다. 서로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에 겨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엘프의 눈이 좀처럼 떠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보이지 않아도 입을 맞추고 속삭이며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둘은 서로의 온기를 맞대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야 해."
"싫어. 더 있다가 가."
"조금 있으면 갈리온이 올텐데?"
"그놈의 영감. 내가 소리 한번 지르면 그만이야."
"그러지마. 스란두일. 좀 더 아랫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줘."
"내 집사에게 관심 꺼줘. 더이상 관심을 가진다면 네가 그를 좋아하는 걸로 오해할테니까."
"하여간에 억지는."

살포시 눈뜬 청회색의 눈동자가 여전히 감은 채로 자신을 껴안은 이를 바라보았다. 별빛 아래에서 산산히 부서지는 금색의 머리칼은 언제 보아도 찬란하고 눈이 부셨다. 흐트러진것을 곱게 손끝으로 내려빗으며 정리하고 있자니 반짝 떠지는 푸른색의 바다가 엘론드를 주시했다.

"머리 만지는게 그렇게 좋아?"
"그럼 싫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아서."
"사실 좋아해. 땋는것도 좋아하고 고운 머릿결을 빗는것도 좋아하지."
"괴상한 취미를 지녔군."
"자꾸 그러면 자네것만 만져주지 않을거야."
"그럼 내 머리는 항상 흐트러져 있겠군."
"그 꼴을 못보는 건 나일테고?"
"잘 아네."

웃음을 지으며 와락 끌어안는 스란두일의 팔이 단단했다. 덩달아 미소를 띄운 얼굴이 금빛 정원에 파묻혔다. 목덜미에서 배어나오는 살냄새를 가득 맡으며 엘론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
"가지마."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떨어지지 마."
"혼자 있기 싫어."
"내가 계속 안아줄께."
"돌려말하는 청혼같아."
"청혼해줄게."
"할게도 아니고 해줄게?"
"네가 원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해줄 수 있어."
"거짓말."
"진심인데."
"해봐 그럼."
"나랑 결혼해줄래?"
"......."

살갑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굳어진 몸이 미동없이 그대로 안겼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어찌할 줄 모르는 눈동자가 조용히 감겼다. 어깨 위로 따스함이 밀려들었다.

"대답도 못할 거면서 조르긴."
"....미안."
"괜찮아."
"미안해...미안해."
"뭘 이런걸 가지고. 정말 괜찮아."
"...좋아해."
"...다시 한번 말해줘."
"좋아해. 스란두일."

밀쳐져 새로운 공간이 생기고 비어버린 품안에 놀라 눈뜬 엘론드의 앞엔 발그랗게 열오른 스란두일이 있었다. 세상 모든 온기를 모아둔 것 같이 붉어진 얼굴에 엘론드마저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만 더."
".... 좋아해. 스란두일."
"나도 좋아해. 엘론드."

두 눈을 바라본 채로 또박또박 내뱉어진 말이 가슴에 닿았다. 새삼스럽게 두근거리는 가슴에 기분이 좋아졌다. 누구랄 것 없이 둘은 웃어버렸다. 좋아서 울어버리기엔 너무나도 나이를 먹었으니까. 세월을 지나 이겨낸 둘은 그저 소리내어 웃었다.

"기분이다. 내가 씻겨줄게."
"됐거든."
"신혼 첫날밤이라고 생각해."
"누구맘대로?"
"당연히 내 맘대로지."

자리에서 일어난 스란두일이 엘론드를 안아들었다. 맨몸의 엘프 둘이 스스럼 없이 엉겼다. 어깨에 팔을 두르다 흠칫 놀란 엘론드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스란두일은 몸을 굽혀 침대 저 멀리 널부러진 자신의 로브를 끌어올려 엘론드를 감쌌다. 둘둘 감아 얼굴만 빼꼼하게 나온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같았다. 그렇게 소중하게 감싼 연인을 껴안고 맨몸의 왕은 걸음을 옮겼다. 둘이 함께 걸어야 할 길을 별들이 찬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벌써 이른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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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귀족과 남창.

2014. 1. 30.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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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서클릿은 너무도 평범해. 에레기온의 왕으로서도. 나의 연인으로서도."

벗겨진 은색의 서클릿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던 안나타르가 불만처럼 속삭였다. 따스한 눈으로 곁에서 바라보던 켈레브림보르는 그저 손을 올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입술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켈레브림보르의 입술을 답답하게 쳐다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그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내가 새로 만들어줄까? 그대에게 잘 어울리도록 작은 진주들과 사파이어로 장식 된 튼튼하고 빛나는 관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대답을 요구하자 한참을 말을 고르던 켈레브림보르가 입을 열었다.

"네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 하지만 내 서클릿은 이정도면 충분해."
"어째서? 너무 투박하잖아?"
"그게 나 답지 않아?"

유리처럼 맑은 흰 빛을 내어놓는 부드러움. 투박한 모양새와 변하지 않는 정결함. 그러나 열을 가하면 쉬이 구부러지는 순수. 어느것과도 어울릴 수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 그것은 켈레브림보르가 지향하고 있는 삶과도 같은 것이었다. 많은 광물들이 있었지만 그는 가장 순수하고 정결한 은을 사랑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채 그저 홀로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우아함. 자신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이 그와 같길 바랬다. 그렇기에 그의 관은 은으로 투박하게 만들어졌다. 자신이 세운 철칙은 지켜져야 했고 불같은 고집은 꺾일 줄을 몰랐다. 그것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부탁일지라도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켈레브림보르를 쳐다보던 안나타르는 손에 들린 관을 도로 그의 머리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뒤 조금은 토라진 모습으로 베게에 얼굴을 파 묻었다. 한참동안이나 머뭇거리던 켈레브림보르의 손이 이불을 끌어올렸고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묵묵히 손길을 받아내던 안나타르가 불현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그래도 그대에겐 화려함 또한 어울려. 왕의 위엄과 에레기온을 상징하는 그 빛 말이야. 언젠가 내가 그대를 위한 관을 만들께.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써줘."
"물론이야."
"안아줘 켈리. 추워."

금새 표정을 바꾸어 미소지으며 제 품안에 달려드는 연인을 온몸으로 받아낸 켈리의 머리 위에 얹혀있던 서클릿이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섬세하게 조각 된 은관의 장식 중 한 부분이 새까맣게 변한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시일이 한참 지나가 버린 뒤였다.

 

 

 

 

 

 

 

 

차가운 손끝이 켈레브림보르의 얼굴을 더듬었다. 핏물에 감기려는 한쪽 눈을 억지로 뜬 채, 켈레브림보르는 흐드러질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것'을 쳐다보았다. 허공으로 매달린 팔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단단한 금속은 손목을 구속했고 살을 파고들었다. 아픔에 신음하면 그 모습이 기쁘다는 듯, 안나타르는 그의 더러워진 이마위에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언젠가 약속했지. 그대를 위한 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그 더러운 입으로 내 귀를 모멸하지 마라"
"그대의 손목에 맞추어 만든거야. 느낌이 어때?"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이 켈리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었다. 화려하게 조각된 문양들은 섬세하게 팔까지 휘감았고 장식된 크고 반짝이는 보석들은 튄 핏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가운데에 크게 박힌 푸른색의 보석이 기쁜 표정으로 웃고있는 안나타르의 얼굴을 온전히 비추었다. 청명히 빛나는 그것은 켈리의 왼쪽 눈 이었다.

"그대에게는 이런 것이 어울려. 내 발 밑에서 짓이겨지고 어둠에 잠식당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갈구하는 그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테지."
"네놈에게 아름다운 것은 끝없는 탐욕과 깊은 어둠뿐이다."
"아니, 찬란한 아름다움을 어둠속으로 끌어내리는것을 좋아해. 그걸 위한 탐욕이다. 좋아하는것을 갖고싶은 욕구가 어째서 나빠?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빙글빙글 웃으며 올라간 손이 천천히 구속구를 쓰다듬었다. 패인 상처들을 헤집고 비어버려 움푹 꺼진 눈꺼플을 핥았다. 아무것도 닿지 않는 혀 끝에선 피맛이 감돌았다.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받을 차례야. 나를 놀라게 하려고 꼭꼭 숨겨두었잖아?"
"악의 피조물에게 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너는 내게 줘야 할 것이 있어."

반지는 어디에 있지? 켈리? 사근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진물이 흐르는 귓가에 달콤하게 스몄다. 마치 어느날의 오후처럼. 제 품에 안겨 웃어보이던 그때처럼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에게 속삭였다. 힐끔 떠진 온전한 눈 한쪽이 안나타르를 바라보다 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서 흉하게 구부러져 있는 서클릿이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카맣게 변한 은. 짓밟힌 순수. 이제 다 끝났는가. 켈레브림보르는 힘없이 웃어보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캄캄해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목이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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