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했다. 보이지 않는 앞에는 나의 주군이 무릎꿇은 채, 치욕을 견뎌내고 계셨다. 주군을 부르짖으며 달려나가려 했지만 날카로운 창과 날붙이들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엄있는 체 하며 앉아있는 발라들을 향해 나는 침을 뱉으며 소리높여 비웃었다. 만웨시여. 발라시여. 의혹의 눈과 어두운 마음으로 나의 주군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네들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고 총명한 분입니다. 주군의 뜻을 곡해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있는대로 잔인한 저주와 그를위한 간청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들의 훈련된 군사들은 나의 입을 막고 내 무릎을 꿇리고 손발을 묶어 구속했다. 몸부림치는대로 더러운 밧줄이 나의 몸을 옭아 매었다. 내게 들리지 않는 발라들의 회의가 오가고 그 모든것을 감내하고 있는 주군의 고개가 점차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마이 로드. 고개를 드세요. 당신은 한 올의 죄책감도 그릇된 점도 없습니다. 고개를. 고개를 드세요.. 채 입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울음이 재갈 안에서 맴돌았다. 

그 순간, 울부짖는 내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했는지 주군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안개속에서도 선연히 빛나는 초록의 눈동자. 그 속에 내가 새겨졌다. 눈물흘리던 나는 무릎꿇고 주군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온 몸 구석구석에 와 닿았다.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지워버리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수치를 잊지마라. 나는..』

갑자기 로드의 주변에 있던 엘프들이 로드를 일으켜 세웠다. 온몸을 지배하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눈앞이 다시 또렷해졌다. 나는 몸부림쳤다. 주군이시여.. 다음. 다음 말은..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 얼룩이 질 때까지 주군은 나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커다란 두개의 돌이 마치 제 의지를 가진 양 굉음을 내며 거대하게 열렸다. 그 칠흑의 어둠속으로 끌려 들어가던 주군이 잠시 멈칫하며 멈춰섰다. 나는 그 순간 발라들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불시에 일어나 주군에게로 달려갔다.
아무런 방어도구를 갖추지 않은 채 도망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군사들은 어렵지 않게 나를 막아섰다. 억지로 흔들고 풀어헤쳐 뱉어낸 재갈을 떨쳐버리고 나는 소리질렀다.

"절대! 절대 주군을 잊지 않겠습니다! 발라의 앞에서! 실마릴의 앞에서 맹세합니다!"

다시 묶인 재갈이 더욱 단단한 것으로 바뀌었다. 바닥으로 밀쳐진 나를 둥글게 막아선 채 군사들은 내게 날붙이들을 겨눴다. 목 바로 아래에 들어온 선연한 칼날의 느낌에 온몸이 부르르떨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위협당해서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둘러싼 군사들의 다리 사이로 보인 잠깐 뒤돌던 주군의 마지막. 아니, 그저 잠시 돌아섰던 얼굴엔, 내게 보내주신 미소가. 대답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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