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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켈리. 처음

2014. 2. 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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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서클릿은 너무도 평범해. 에레기온의 왕으로서도. 나의 연인으로서도."

벗겨진 은색의 서클릿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던 안나타르가 불만처럼 속삭였다. 따스한 눈으로 곁에서 바라보던 켈레브림보르는 그저 손을 올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입술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켈레브림보르의 입술을 답답하게 쳐다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그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내가 새로 만들어줄까? 그대에게 잘 어울리도록 작은 진주들과 사파이어로 장식 된 튼튼하고 빛나는 관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안나타르가 대답을 요구하자 한참을 말을 고르던 켈레브림보르가 입을 열었다.

"네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 하지만 내 서클릿은 이정도면 충분해."
"어째서? 너무 투박하잖아?"
"그게 나 답지 않아?"

유리처럼 맑은 흰 빛을 내어놓는 부드러움. 투박한 모양새와 변하지 않는 정결함. 그러나 열을 가하면 쉬이 구부러지는 순수. 어느것과도 어울릴 수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 그것은 켈레브림보르가 지향하고 있는 삶과도 같은 것이었다. 많은 광물들이 있었지만 그는 가장 순수하고 정결한 은을 사랑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채 그저 홀로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우아함. 자신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이 그와 같길 바랬다. 그렇기에 그의 관은 은으로 투박하게 만들어졌다. 자신이 세운 철칙은 지켜져야 했고 불같은 고집은 꺾일 줄을 몰랐다. 그것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부탁일지라도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켈레브림보르를 쳐다보던 안나타르는 손에 들린 관을 도로 그의 머리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뒤 조금은 토라진 모습으로 베게에 얼굴을 파 묻었다. 한참동안이나 머뭇거리던 켈레브림보르의 손이 이불을 끌어올렸고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묵묵히 손길을 받아내던 안나타르가 불현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그래도 그대에겐 화려함 또한 어울려. 왕의 위엄과 에레기온을 상징하는 그 빛 말이야. 언젠가 내가 그대를 위한 관을 만들께.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써줘."
"물론이야."
"안아줘 켈리. 추워."

금새 표정을 바꾸어 미소지으며 제 품안에 달려드는 연인을 온몸으로 받아낸 켈리의 머리 위에 얹혀있던 서클릿이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섬세하게 조각 된 은관의 장식 중 한 부분이 새까맣게 변한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시일이 한참 지나가 버린 뒤였다.

 

 

 

 

 

 

 

 

차가운 손끝이 켈레브림보르의 얼굴을 더듬었다. 핏물에 감기려는 한쪽 눈을 억지로 뜬 채, 켈레브림보르는 흐드러질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것'을 쳐다보았다. 허공으로 매달린 팔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단단한 금속은 손목을 구속했고 살을 파고들었다. 아픔에 신음하면 그 모습이 기쁘다는 듯, 안나타르는 그의 더러워진 이마위에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언젠가 약속했지. 그대를 위한 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그 더러운 입으로 내 귀를 모멸하지 마라"
"그대의 손목에 맞추어 만든거야. 느낌이 어때?"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이 켈리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었다. 화려하게 조각된 문양들은 섬세하게 팔까지 휘감았고 장식된 크고 반짝이는 보석들은 튄 핏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가운데에 크게 박힌 푸른색의 보석이 기쁜 표정으로 웃고있는 안나타르의 얼굴을 온전히 비추었다. 청명히 빛나는 그것은 켈리의 왼쪽 눈 이었다.

"그대에게는 이런 것이 어울려. 내 발 밑에서 짓이겨지고 어둠에 잠식당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갈구하는 그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테지."
"네놈에게 아름다운 것은 끝없는 탐욕과 깊은 어둠뿐이다."
"아니, 찬란한 아름다움을 어둠속으로 끌어내리는것을 좋아해. 그걸 위한 탐욕이다. 좋아하는것을 갖고싶은 욕구가 어째서 나빠?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빙글빙글 웃으며 올라간 손이 천천히 구속구를 쓰다듬었다. 패인 상처들을 헤집고 비어버려 움푹 꺼진 눈꺼플을 핥았다. 아무것도 닿지 않는 혀 끝에선 피맛이 감돌았다.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받을 차례야. 나를 놀라게 하려고 꼭꼭 숨겨두었잖아?"
"악의 피조물에게 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너는 내게 줘야 할 것이 있어."

반지는 어디에 있지? 켈리? 사근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진물이 흐르는 귓가에 달콤하게 스몄다. 마치 어느날의 오후처럼. 제 품에 안겨 웃어보이던 그때처럼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에게 속삭였다. 힐끔 떠진 온전한 눈 한쪽이 안나타르를 바라보다 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서 흉하게 구부러져 있는 서클릿이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카맣게 변한 은. 짓밟힌 순수. 이제 다 끝났는가. 켈레브림보르는 힘없이 웃어보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캄캄해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목이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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