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오로. 무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사방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군사들과 은빛 휘장을 두른 엘프들이 서로에게 활과 칼을 겨눴다. 아무리 보아도 수적으로 엘프들에게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헛점을 노리기에는 충분했다. 죽음을 감행한 엘프들의 공격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갔다. 어자피 돌아가기 힘들 거라는 것을 오로페르는 알고 있었다. 멍청한 놀도르 상급왕에 대한 신다르 일족의 선물이라 명명하자며 그의 가신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긴것은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적진에 은밀히 침투하여 최대한의 피해를 내는 것, 그것이 오로페르의 목표이자 그를 따르는 그린우드 병사들이 명받은 최후의 임무였다. 신다르의 손으로 승패를 결정하자. 라는 저돌적인 왕의 뜻에 엘프들은 쓰러지면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고 숨이 끊어지려는 그 순간에도 적의 목숨을 노렸다. 그러나 용맹함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군대는 아니었다. 이미 절반 이상의 수가 무너졌고 비명과 열기가 가득한 이곳에 희망은 없었다. 이젠 죽음까지 한 발자국만을 남겨두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침착하게 자신의 품안으로 날아든 오크의 팔을 던져버리고 오로페르는 다시한 번 숨을 몰아쉬며 뛰어내렸다. 피에 젖은 칼날이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몇 번이고 검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터라 그린우드의 사기는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큰 목소리로 독려하며 앞을 헤쳐보지만 오로페르에게도 버거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것은 이쪽이다. 상황을 눈치챈 적들은 순식간에 무장을 한 채, 침입자들에게로 뛰어들었다. 애써 잡은 우위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오로페르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어자피 버리기로 한 목숨. 아까울것은 없었다. 다만 한놈이라도 더 쓰러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빌었을 때, 눈 앞에서 녹슬은 쇳덩이가 번뜩였다.
"주군!!!!!!!!!!!!!!!!!!!!!!"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에 반사적으로 막아선 검이 오크의 칼날을 가로막았다. 아니 막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팔에, 검에 닿은 것은 오크의 더러운 살덩이가 아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소리를 지른 가신의 몸뚱이였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날붙이에 가슴을 뚫리고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며 고통스러워하는 가신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무..사하시군요. 한마디 말을 내뱉고 다시 꾹 다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해 볼 시간도 없이 가신은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꿰뚫은 오크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천천히 무너지는 가신의 몸뚱이를 붙잡고 소리지르며 검을 휘둘렀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동작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무너져내린 엘프 둘 따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떨리는 손으로 채 감지못한 가신의 눈가를 지그시 눌러준 오로페르는 혼자 보내지 않겠다며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이를 악물고 일어나 위협당하고 있는 궁병들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갑자기 막힌 공격에 오크떼들이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 몰려들었다. 막 앞에서 달려오는 놈의 정수리에 내리찍으려고 준비하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오크의 이마 정 중앙에 꽂혔다. 그 한 발의 화살을 기점으로 뒤쪽에서 화살비가 쏟아져내렸다. 용케 엘프들은 걸러낸 채, 적들을 겨냥하는 화살에 당황한 그린우드의 전사들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지원군이 없을텐데..? 막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오로페르의 눈에 낭패의 빛이 어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푸른 문양이었다.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린돈의 군사들은 서둘러 살을 날려 적들을 위협했다. 동요하는 군사들에게 당황하지 말라며 크게 외치는 오로페르가 다시 침착하게 남은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무하리만치 짧은 시간이 지나고 작은 부대하나가 완전히 궤멸된 후에서야 그린우드의 병사들은 고개를 들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서로를 쳐다보는 그 눈빛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린돈의 군사들이 끼어드는 순간 많은 동료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탄식하며 미간을 부여잡은 오로페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어라 소리지르려는 순간, 목 뒤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희미해진 시야에 무섭도록 차가운 길 갈라드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몇번이고 쿵쿵대며 벽을 울리는 소리에 길갈라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풀어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서겠지. 움찔대며 신경을 쓰려는 부관에게 눈짓을 하자 큼큼 목소리를 더듬어가며 사후보고를 마쳤다. 간결하게 요약된 보고서 마지막에 거칠게 사인을 하고서야 길 갈라드는 부관을 내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방으로 향했다.
더러운 천으로 뒤덮인 길쭉한 자루가 방 한 구석 침대 위에 덜렁 있었다. 무언가 하고 있는지 꿈틀거리며 얇은 천이 움직이는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기척을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길갈라드는 묶여있는 자루로 다가가 끈을 풀기 시작했다. 더운 공기가 훅 뻗어나오고 군데군데 피로 얼룩졌지만 여전히 빛나는 은발이 드러났다. 정신을 차린지 꽤 오래되었는지 무어라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과하게 몸을 비틀어 자루를 빠져나오려 애쓰던 오로페르는 겨우 상반신이 바깥으로 노출되고서야 정신을 다잡고 길 갈라드를 노려보았다. 분노의 가득찬 시선을 받아내는 이 치고 무표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길갈라드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어내고 입을 막은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호의를 보이자 마자 돌아온 것은 저주의 언사를 내뱉는 과격함이었다.
"네놈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성문 정도는 열 수 있었다!!! 이게 무슨짓이냐!!"
"....당신이야 말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정잡배도 아니고."
"놀도르의 대왕을 자칭하는 그대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언사가 아닌가. 이런식으로 뒷통수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군."
"말은 바로하셔야지요. 뒷통수를 맞은건 저이지 않습니까."
자신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받아내며 길갈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이 멀쩡한 것을 보니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는 모양이군. 한참동안이나 저주의 말이 섞인 이야기를 내뱉는 오로페르덕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길갈라드는 몸부림치는 그를 도와 감싸고 있던 자루를 벗겨내었다. 궁지에 몰린 그를 보자마자 뒷목을 쳐 기절시킨 후, 남들의 이목에 띄지 않도록 수레에 던져넣고 진지로 귀환한 터였다. 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외려 처리하기에는 수월했다. 사라진 군대에 대해선 비밀 임무를 띈 채, 은밀히 이동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고 그 인솔을 그린우드의 왕께 맡기었다 하면 또 그만이었다. 어자피 살아남은 이들은 정신을 잃은 주군을 확인한 뒤 스스로 무기를 던졌다. 한 가지의 문제라면 많은 수의 군대를 잃고 홀로 서야 할 왕의 거취 뿐이었다.
겨우 빼낸 자루를 뭉쳐 근처에 던져둔 길갈라드는 손을 털며 굽어진 허리를 폈다. 귀 뒤로 넘겨준 보람도 없이 다시 흐트러진 은빛의 머리칼에 가리워 오로페르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자루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발길질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얌전했다. 다시한번 머리칼을 정리하려 뻗은 손길에 무언가 딱,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묶여 늘어진 몸이 작게 움찔하더니 그대로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에 엎어진 몸뚱이를 일으켰다. 다 터진 입술에 무언가가 물려있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왕의 목걸이. 작은 유리로 된 장식 속에서 검은 가루가 산산히 흘렀다.
"이런 젠장."
입속으로 우악스럽게 손가락을 쑤셔넣으며 목 안쪽을 긁어냈다. 소리를 높여 입구에 대기하던 부관을 불렀다. 막 헛구역질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크게 당황한 부관이 그 길로 달려가 엘론드를 데려왔다. 다급하게 응급상자를 가지고 들이닥친 엘론드가 다가왔을 때에는 이미 억지로 물을 주입하고 토해내게 하는 중 이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으니 염려말거라. 그보다 저것을 먹었다. 무엇인지 확인해보거라."
다시한번 물을 먹이고 등을 세게 두드려는 손짓이 빨라졌다. 곁에서 남은 가루를 찍어 맛을 본 엘론드의 낯색이 희게 질렸다. 가지고 온 상자를 열어 이것 저것을 섞어내던 엘론드가 흰 종이위에 해독제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정신이 든 오로페르가 이를 악물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엘론드! 그걸 물에 타라!"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오로페르의 뺨을 몇대 갈기던 길갈라드는 도무지 진정하지 않는 모습에 오로페르의 위쪽으로 올라탔다. 움직이려는 얼굴을 붙잡고 숨쉬지 못하게 코를 막은 뒤 엘론드가 받쳐준 그릇에 담긴 물을 머금고 입술을 겹쳤다. 반항하려는 몸짓은 길고도 끈질겼으나 부족한 산소에 몸이 잘게 떨려왔다. 기어코 입을 열고만 틈새로 물이 줄줄 흘렀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고서야 경련이 멈추고 몸에서 힘이 풀렸다. 마지막 모금까지 넘긴것을 확인한 길갈라드가 그제서야 우악스럽게 잡았던 턱과 코를 놓아주었다. 잔기침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 오로페르의 눈동자에 촛점이 제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길갈라드는 조용히 엘론드를 물러나게 했다. 너저분해진 얼굴과 시트에 떨어지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뜨거운 눈물이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마십시오."
"...나이어린 전사들도, 함께 그린우드에 입성한 친우들도 모두 떠나보냈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쓸데없는 짓은 네놈이 하고 있지 않느냐!!!"
"잃은 백성만 백성입니까!!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은 이들은 당신의 백성이 아닙니까!!!!"
저도 모르게 잡아올린 멱살에 숨이 막히는지 열오른 얼굴사이로 거둬지지 않는 적개심이 보였다. 여전히 냉정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한 번이라도 나를 살갑게 봐준 적이 있었던가.
잡았던 멱살을 풀고 도로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굴러다니는 천조각을 들고 다시 기침을 시작한 틈을 타 길갈라드는 재갈을 물렸다. 허튼짓을 하게 둘 순 없었다. 인간과 요정의 동맹. 그 이전에 놀도르와 신다르의 동맹. 이 자리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있었는지 그가 모를리 없을터. 묶여진 매듭을 쓰다듬으며 다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몸부림쳐도 이젠 소용없었다.
"이 지옥의 끝에서 혼자서 도망치게 제가 놔둘 것 같습니까?"
"ㅇ..ㅇㅡ.읍..읍!!!!!"
"그린우드에서 지원군이 온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돌려보냈습니다. 어린 왕자에게는 길고도 잔혹한 싸움이 아닙니까."
거짓말처럼 몸부림이 멈추었다. 크게 떠진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눈을 하는 때도 있구나. 새삼 길갈라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늘 자신을 쏘아보던 눈이었다. 한참 그렇게 오로페르를 쳐다보던 눈은 잠깐 감겼다 평소의 눈으로 돌아왔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당분간은 제 침소에 계셔야겠습니다. 대단한 분이 벌이신 소동을 수습하려면 제게도 시간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주십시오. 오로페르."
처음으로 멋대로 불린 이름에 오로페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끝에서 굴러가는 발음을 되뇌어보던 길갈라드는 슬며시 미소를 입술에 띄웠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겁니다. 그대에게도, 그대의 왕자에게도 말입니다. 협박조의 문장을 주억거리며 엉킨 은색의 머리칼을 모두 풀어낸 길갈라드는 남은 천조각을 길게 찢어 침대의 기둥과 오로페르의 손목을 연결시켰다. 몇번이고 묶인 매듭을 확인하고 오로페르가 보이지 않게 얇은 이불을 덮은 후에서야 몸을 일으켰다. 무어라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왕이 있는 곳을 잠시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방안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이의 흐느낌만이 아주 가늘게 퍼졌다.
오로페르가 길갈 명령 어기고 결사대 이끌고 나갔다가 부하들과 함께 죽을 각오였는데 길갈이 도중에 오로페르만 구해서 온거 보고 싶어요ㅠㅠㅠㅠ오로페르는 부하들 다 죽이고 자기만 살아 돌아오면 뭐하냐고 길갈한테 제발 죽게 해달라고 하면서 막 자살하려고 하니까 길갈이 자기 침소에 가둬놓고 입에 천 물려놓고 양손 구속하고 다리에 족쇄 채워서 꼼짝 못하게 해놨는데 안전을 위해서 였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속에 위험한 욕망이 이글이글...아... <- 라는 카르님 리퀘..인데....:Q.....욕망 어디갔어요....